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드쿤 크비슬링 (문단 편집) === 몰락과 죽음 === >내가 한 일이 진정 반역이라면, 조국을 위해 신께 기도하겠습니다. 노르웨이의 젊은이들이 나처럼 반역자가 되기를! 그렇지만 감옥에는 가지 않기를! >---- >1945년 9월 7일, 크비슬링의 최후 진술 이후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밀려나고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이 상륙하는데도 크비슬링은 히틀러에게 전보를 보내 독일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했고 독일의 신무기가 전세를 뒤집을 것이란 망상에 빠져 살았다. 크비슬링 본인은 권력을 모두 잃고 신비주의 사상에 빠져 고향에 돌아가 목사를 하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수준이었다. 결국 독일이 완전히 몰락하자 크비슬링은 노르웨이 레지스탕스 세력과 협상, 1945년 5월 8일 평화적인 권력 이양에 대해 합의했으나 이 합의는 바로 깨졌고 [[크비슬링 정권]]은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와 덩달아 멸망한다. 권력을 잃은 크비슬링은 5월 9일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크비슬링은 5월 26일 예심법정에 회부되었고 1940년 4월 9일의 불법 권력 취득, 군대에 대한 불법 해산에 대한 1902년 군민법 상의 반역죄, 전쟁 중 적에게 협력하여 형법 86항을 위반한 죄, 불법으로 헌법을 정지시킨 것에 대한 형법 98항 국가질서 파괴 행위, 에일리프센에 대한 불법 처형 죄로 회부되었다. 크비슬링은 4주에 걸쳐 60쪽에 달하는 반박문을 작성해서 제출했다. 그는 자신이 독일의 공습을 사전에 알지 못했고 군대 해산은 부득이한 조치였으며 자신은 노르웨이의 독립을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1939년에 히틀러와 만났던 것, 1940년 4월 독일군과 접촉했던 것 등이 그가 간첩이라는 주요한 혐의로 해석되었다. 그가 필히 독일에 군사기밀을 넘겼고 독일이 그것을 바탕으로 공습했을 것이란 것이었다. 거기에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된 독일 각료들의 증언이 나오자 노르웨이 검찰은 이를 추가적인 증거로 채택했다. 평소에 매우 비사교적이고 과묵한 것으로 유명했던 크비슬링은 재판정에서 전에 없이 자신의 역사와 철학에 대해서 토해내면서 끝까지 무죄를 강변했고 자신이 독일에 협력한 것은 [[레벤스라움|독일이 건설할 유럽연방]]에서의 노르웨이의 위치를 사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저는 바이킹의 무덤들이 있는 곳에서 성서에서 나온 이야기와 오래된 무용담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오랜 전통을 지닌 가문에서 태어나 늘 가문에 대한 자긍심과 민족적 책임감을 가지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비요르손과 입센 역시 저와 같은 가문으로, 제게는 무척 친숙한 사람들입니다. 크비슬링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외래어가 아니라 고대 북유럽인의 이름으로, 왕족의 한 분파입니다. 이름의 첫 글자인 Q는 고대 룬 문자로 보호를 의미합니다.[* 사족으로 그의 주장과 달리 [[룬 문자]]에는 공식적으로 라틴 문자의 'Q'에 해당하는 글자가 없다. 굳이 따지자면 룬 문자 중에서 "ᛉ"라는 글자에 "보호"나 "방어"의 의미가 있다고 추정되긴 하는데, 이 또한 추정일 뿐이며 이 글자의 음가는 고대 게르만어 *z이다.] 저는 이러한 배경에서,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슴에 품으며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처칠의 노르웨이 침공 시도는 아직 증명되지 않은 사안이었고 크비슬링 본인의 건강이 크게 나빠서 제대로 된 발언을 하지 못했으며 그가 쿠데타 시도, 독일 정부와의 접촉 등에서 한 발언은 크게 불리하게 적용되었음에도 그는 재판이 잘 되었다고 착각했다. 크비슬링에 대한 증오와 적대는 엄청나서 크비슬링의 경호원들은 만약 정부가 그를 사형시키지 않으면 자신들이 그를 죽이겠다고 외치고 있을 정도였다. 이러다가 참모본부 장군 할보르 한손, 빌헬름 울만, 노르웨이 군 최고 사령관 오토 루게 등이 전쟁 전의 크비슬링에 관한 유리한 증언을 하자 결국 크비슬링이 정신병에 걸려 독일에 협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검사 결과 정상으로 드러났다. 크비슬링에겐 9월 10일 사형이 선고되었고 크비슬링은 항소했다. 크비슬링은 10월 9일 대법원에서 다시 연설했다. >원한다면 사형선고를 내려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노르웨이 국민 전체가 살인죄를 짊어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사형이나 징역을 선고받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친척이 걱정되고, 노르웨이 국민이 걱정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10월 13일 항소는 기각되었고 크비슬링은 자신의 우주교 이론을 요약한 글을 집필하고 성경을 읽으며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크비슬링은 마지막으로 국왕에게 편지를 보내 사형이 불법이라 주장했으나 10월 23일 노르웨이 왕실은 특별사면 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싸늘하게 답변했다. 10월 23일 저녁 7시, 교도소의 목사가 찾아와 자정에 사형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크비슬링은 마지막으로 아내를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거부되었다. 사형은 덴마크 경찰청장의 비행기가 연착되어서 2시로 연기되었고 목사가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을 읽어주었다. 크비슬링은 눈가리개를 씌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으나 변호사가 규정상 안 된다고 거절했다. 10월 24일 새벽 2시 40분, 총살대가 배치되었고 크비슬링은 끝까지 무죄를 외치다가 총살되었다. 크비슬링 정부의 핵심인사 25명 또한 사형당했다. 그러나 당시 노르웨이에서 사형을 집행할 때 총살형이 없었는데 크비슬링의 재판 때문에 다시 총살형을 부활시킨 것을 두고 몇몇 사람들은 재판의 공정성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